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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 마운드를 책임지던 류현진

    1. 아마추어

    류현진은 1987년 3월 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191cm의 키와 113kg의 덩치를 가지고 있으며 좌투우타, 선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별명으론 류뚱, 코리아 몬스터로 많이 불리고 다른 별명도 유명세만큼 많다. 인천창영초-동산중-동산고를 졸업하였다. 류현진은 고등학교 시절 2학년 때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학년 때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청룡기 때 초반 3경기를 무실점으로 승리를 이끌고 성남고와의 대결에서는 14K를 기록하면서 관심을 받았다. 무리한 탓인지 결승전에서는 5 실점을 하였다. 그래도 타선의 도움으로 역전승을 하며 우승을 하였다.

    2. 프로선수

    류현진은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었다. 롯데와 SK에서도 기회가 있었지만 나름 구단의 사정에 의해서 지명을 안 했다. 가끔씩 팬들은 왜 류현진을 지명 안 했는가에 대해서 묻는다. 입단 후 첫해부터 트리플크라운을 기록했다. 당시 신인 최초로 200이닝 200K를 하며 18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 2.23을 기록했다. 신인왕은 당연히 차지했으며 투수 부분 골든 글러브, 정규 시즌 MVP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연봉 2천만 원에서 1억으로 뛰어버렸다. 그리고 승리는 챙기지 못했지만 개막전 선발투수로 올라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154km/h의 최고 구속을 기록했다. 211이닝 175K, 평균자책점 2.94로 시즌을 마감하며 이전 시즌 MVP 투수답게 실력을 증명했다. 2008년에도 역시나 잘했다. 이해에는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다. 캐나다전에서 완봉승을 거뒀다. 역대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2번째였다. 결승전에선 9회 1 아웃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내려왔다. 올림픽 경기 중 김광현과 선발 마운드를 지켰으며 국가대표 원투펀치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해부터 한화의 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2009년이 되었으나 타선의 지원도 사라지고 그나마 있던 투수진의 지원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팀을 이끌고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되며 패가 늘었다. 그래도 개인 성적은 유지하며 탈삼진 타이틀도 가져왔다. 2010년도 타선과 투수들의 지원은 없기 마찬가지였다. 2009년 경기부터 시작해서 29경기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지만 팀은 하위권이었다. 투수들 중에서 최고의 기록을 찍은 한 해였고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도 달성하였다. 2011년도 팀은 여전했다. 그리고 류현진도 중간에 부상으로 재활 군으로 내려가면서 커리어 로우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그래도 잘했다는 건 부정 못 한다. 메이저리그로 가기 전 마지막 시즌인 2012년 27경기 9승 9패, 평균자책점 2.66, 210 탈삼진, 22회의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기록에 비해서 승수가 너무 적었다. 승운이 너무나도 없었고 타선의 뒷받침 또한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타선만 지원 못 해준 것도 아니고 수비에서도 여전히 많은 실책으로 류현진의 승을 못 올리게 막아버렸다. 홀로 이끌어가던 팀을 놓고 류현진은 포스팅 시스템을 이용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3. 국가대표

    류현진의 첫 국제 대회는 고졸 신인으로 지낸 첫해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출전하였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연속 금메달을 기록했었기에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대만과의 첫 경기에서부터 패배를 하고 류현진은 일본전 선발 등판을 하였다. 일본 대표팀은 실업야구로 구성된 팀이었다. 초반에 잘 던지던 류현진은 3회에 5 실점을 하며 강판당했다. 그리고 다음 선발은 중국과의 동메달 경기였다.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부진했다. 4이닝 2 실점이었다. 그렇게 도하 참사라는 말을 들으며 동메달을 목에 걸고 대회를 끝마쳤다. 2007년엔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가 있었다. 1위를 하면 편하게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직행이지만 2위로 마감하며 최종예선부터 경기를 진행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그리고 2008년 예선에서 류현진은 호주전에 나서서 타선을 봉쇄하며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캐나다전에서는 1.2이닝 동안 3 실점을 내주면서 패전을 기록했다. 그래도 베이징올림픽 본선 티켓을 얻고 귀국하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류현진의 첫 경기는 캐나다였다. 한국의 대표 투수답게 예선에서 져서 그런지 완봉승을 거둬 버렸다. 캐나다 타선을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9회 때 위기는 있었으나 이겨냈다. 그러고 나서 결승전에 등판하였다. 상대는 쿠바. 시작은 이승엽의 투런홈런으로 산뜻하게 출발했으나 공수 교체 후 솔로홈런을 허용했다. 그렇게 9회까지 던졌다. 스코어는 3-2였다. 그리고 주심의 탐탁지 않은 스트라이크를 볼로 선언하면서 1사 만루가 되었다. 강민호가 항의하자 퇴장되었고 그리고 진갑용이 포수로 들어오면서 류현진도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마무리는 정대현이 병살을 이끌어내며 대회 우승을 마무리했다. 금메달을 획득한 류현진은 병역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9 WBC에서는 첫 경기에 대만을 만나 승리투수가 되었으며 그리고 다음 선발경기는 멕시코 전에 나왔다. 2.2이닝 2 실점을 기록하면서 선발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류현진은 구원으로 등판하였고 무난하게 나머지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성적은 2위로 끝났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마지막 국가대표 선수로서 출전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이다. 이전 도하 참사의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예선 1라운드에서 대만전 선발로 등판했고 6이닝 1 실점으로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다시 등판했다. 4회까지 3 실점을 했지만 그래도 잘 버텨줬고 타선이 잘 터진 덕분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금메달을 목에 걸고 명예회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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